순교자현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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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 : 생명의길

총 거리: 5.9km
소요 시간: 2시간 30분

조선 왕조는 임금의 명령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선시하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여러 차례의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생명의 길’은 특히 가장 많은 신자가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포함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깊습니다.

순교는 신앙에 대한 최상의 증거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희망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고귀한 진리를 찾았습니다. 신앙 선조들께서 순교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러 가는 길이었기에 ‘생명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지금은 그 형태를 볼 수 없지만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이루어졌던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각해 보고, 순교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보편적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순례지
① 가회동 성당
북촌한옥마을이 있는 계동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자 마지막 조선 왕실이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이 지역의 관할 성당인 가회동 성당은 역사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사랑채, 대청마루를 가진 한옥과 성당이 들어선 양옥이 어우러진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성당 1층에는 한국 천주교회와 가회동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순례지
② 광화문 124위 시복 터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행해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 여러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광화문 광장은 옛 조선의 육조를 비롯한 여러 관청들이 위치했던 곳으로, 사상범으로 몰려 처형된 무고한 순교자들에 대한 박해와 고난과 몰이해의 장소에서 인정과 화해의 축복의 장으로 전환되는 하느님의 용서의 증표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교회사적지
③ 형조 터
형조는 조선시대 중앙 관청인 육조의 하나로, 사헌부·한성부와 더불어 삼법사로 불리며 조선 시대 사법 기관의 한 축을 이루었던 곳입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수많은 교인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는데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하던 교인들을 압송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교인과 성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교회사적지
④ 의금부 터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조선시대 최고 사법기관 중 하나였습니다. 주로 대역 죄, 모반 죄, 유교 윤리를 어긴 강상죄 등 국가의 안위에 관련되는 중대사 및 국사범의 재판을 담당하였습니다. 신유박해(1801) 당시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 기해박해(1839) 순교자 정하상 바오로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병인박해(1866) 순교자 남종삼 요한 등이 꿋꿋이 신앙을 지킨 증거 터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사적지
⑤ 전옥서 터
전옥서는 옥에 갇힌 죄인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사형이나 유배 등의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죄인을 가두어 두던 감옥의 역할도 겸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이곳에 짧게는 한 달, 길게는 4년까지 구금되어 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전옥서에 수감된 계층은 주로 평범한 농민·상민이었으나 때로는 의금부나 형조의 소관인 지도층 신자들 역시 수감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사적지
⑥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 희생된 곳입니다.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사목하던 드게트 신부와 신자들은 공주 감영을 거쳐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는데, 당시 투옥된 교인들을 괴롭힌 것은 가혹한 굶주림이었습니다. 결국 압송된 신자들 중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이 우포도청의 옥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앞두고 그의 마지막 옥중 서간을 작성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사적지
⑦ 경기감영 터
1784년 명례방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된 이후로 성장해 오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들은 신유박해(1801)를 기점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때 경기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형벌과 문초를 겪으며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 바로 경기감영입니다.
순교성지
⑧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소문(西小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왕래가 잦았던 서소문 밖의 네거리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범죄를 예방하려는 목적에서 조선 초기부터 한양의 공식 처형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 4월 8일부터이며 서울에 거주하거나 적어도 서울에 연고를 둔 신자들이 주로 처형되었습니다. 사료를 통해 천주교와 연관되어 사형이 집행된 수만 98명으로 밝혀졌는데, 이 가운데 44명이 성인품에, 27명이 복자품에 올라 단일 장소에서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가 탄생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가 되었습니다. 1984년에 103위 시성을 기념하여 서소문공원 안에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순교자현양탑(1999년)을 세웠고, 2011년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시작으로 8년간의 노력 끝에 2019년 6월 1일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인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공식 개관하였습니다.
순례지
⑨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 약현성당은 1891년 11월 9일 명동 본당에서 분할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으로, 규모는 명동대성당보다 작지만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최초의 고딕식 성당입니다. 건축 당시 기술과 재정 부족으로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절충해서 성당의 기본 공간과 형태를 간소하게 갖추어 지어졌지만, 아치형의 간결한 기둥과 둥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1896년 3월 한국 최초로 사제 서품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본당 안에 서소문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을 세웠는데, 기념 성당과 전시실에는 성인들의 유해와 함께 선조들이 사용하던 유품, 교리서와 성서를 비롯한 다양한 교회 출판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